티스토리 뷰

모순 矛盾

[짐랩/민랩] 모순 矛盾 - 02

주방장 2017. 12. 31. 23:55

 

 

 

[짐랩/민랩] 모순 矛盾 - 02

 모순 ; contradiction,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맞지 않음

 

 

 

W. 주방장

 

 

 

"팀장님, 여기 아까 거래처에서 연락 왔었는…. 어디 안 좋으세요? 안색이 조금, 아까보다 안 좋아지셨는데. 회의에서 무슨 일이라도…."
 "아, 고마워요. 안색 그렇게 나쁩니까? 역시, 회의가 좀 힘들었거든요. 각팀마다 공동 프로젝트 있답니다."

 

 

 

 부서로 돌아오자마자 제게 쪽지를 내미는 손에 가볍게 받아 용건을 훑어보던 남준이 안색이 안 좋다는 말에 입꼬리만 슬쩍 올려 웃었다. 지민과의 마찰을 최대한 적게 만들 생각으로 가득 차 제 표정이 어떤지도 몰랐다. 공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조별과제는 이제 졸업한 줄 알았는데. 분위기를 잘 띄우는 대리의 목소리에 남준을 비롯한 부서 전체가 웃음을 터트렸다. 각자 자신이 만났던 베스트 진상을 하나둘씩 꺼내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도중 갑자기 열리는 부서 문에 부서 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바로 몸을 일으켜 문에 정중히 인사를 하는 직원들에 설마 싶어 고개를 천천히 돌리자 새카만 두 눈이 남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민이 여기에는 왜? 한껏 당황한 얼굴로 지민을 보기도 잠시 굳어 올라가려 하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당겨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저를 응시하던 눈과 다르게 순하게 접힌 눈매가 제 직원들을 향해 있었다. 답답하다. 낯을 가리기도 했지만 불편함이 답답할 정도는 아니었다. 울창하고 빽빽한 숲 한가운데 혼자 놓여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없이, 혼자만.

 

 

 

 "이제 같은 팀인데, 대면식 정도는 해야 될 것 같아서. 혹시 불청객은 아니죠? 뭔가 화목하길래 타이밍 잘 맞췄다고 왔는데…."
 "네? 아뇨, 그럴 리가요. 우리 팀장님 같이 젊은 팀장님이 또 계셨다는 거에 다들 쇼크 먹어서 그래요."
 "아, 그런 겁니까? 이거 참, 우리 부서에서 듣지 못하는 소리 여기서 들으니까 기분 좋네요. 여기 오고 싶다."

 

 

 

 재치 있는 대리는 지민과의 만남을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저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지민의 첫인상은 완벽에 가까웠다. 이 공간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저 혼자인 것 같았다. 숨 막혀. 혼자만의 답답함에 조금이라도 편해지려 넥타이를 잡아 살짝 풀었다. 은근한 시선에 대충 미소를 걸친 남준이 지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웬만하면 절대 접촉을 삼가고 싶었다. 지민이 제 형질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우성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내민 손을 잡아준 지민의 손은 따듯했지만 제게 붙는 시선은 따듯하지 못했다. 차갑다기보단 묘하게 수를 읽으려는 눈빛이 남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준 씨."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부서 사무실을 나서는 걸 보고 나서야 그제야 참았던 숨을 텄다. 키도 작은 게 어디서 그런 기가. 속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린 남준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자리에 돌아와 쪽지에 적혀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자 얼마 지나지 않아 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에 거래를 했던 기업의 이사 직접 연락을 남긴 것에 조금 놀라기도 잠시 앞으로 계속 거래를 진행하자며 다음 미팅 일정을 잡자는 말에 황급히 메모지를 들었다. 순조롭게 미팅 일정을 잡고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전화가 끊기길 기다리며 메모지에 휘갈겨진 글씨를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네임드 기업 중에서도 원탑이라 불리는 기업이었는데, 장기간 계약을 잡다니 꽤 좋은 승진감이었다.

 

 

 

 “여러분, 우리 올해 실적 1등 또 하겠는데요.”
 “네? 설마 거기서…….”
 “앞으로도 쭉 계약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잘하면 실적 1위뿐만 아니라 보너스도 톡톡히 받을 수 있겠네요. 부드럽게 웃던 남준이 어깨를 으쓱이자 직원들이 환호를 자아냈다. 그럼 저희 오늘 회식하면 안 돼요? 기념으로. 대리의 의견에 하나같이 동의를 표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기대하는 눈들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고민하는 척 작게 미간을 찌푸리니 눈치를 보는 이들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큰 건을 땄으니까 역시….

 

 

 

 “한우 정도는 먹어야겠죠?”
 “평생 충성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팀장님.”

 아첨이 가득 발린 대리의 말이 기분 나쁘긴커녕 오히려 웃음이 났다. 들뜬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자 다들 각자 자리에 업무를 수행하는데 한참 보고서를 검토 중이던 남준의 메시지 창에 알람이 울렸다. 팀 내에서 남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또 윤 이사인가 싶어 한숨을 내쉬며 모니터를 확인하니 발신인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영업 2팀 박지민.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이 사람이 왜? 하는 의문도 잠시 공동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사실이 기억나 급히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희 프로젝트 회의는 언제 할까요?]

 

 


 역시나 프로젝트 회의에 대한 내용이었다. 지민의 스케줄에 맞추겠다며 답장을 써 내려가던 도중 손가락이 저절로 멈췄다. 되는 시간에 맞춘다 하면 아마 주말에 지민과 프로젝트 회의를 할 게 뻔했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던 주말마저 방해받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애초에 공적인 일을 사적까지 끌어들이기 않는다는 게 회사의 원칙이니 주말에 만나자고 해도 약속이 있다 얼버무리면 그만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대화창을 보던 남준이 그대로 답장을 보냈다. 이번 주는 조금 어렵겠는데요, 다음 주 어떻습니까.

 

 


 [주말은 곤란한가요?]

 

 


 주말에는 제발 나도 좀 쉬자. 탄식을 내뱉으며 그대로 타자를 치던 남준이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내용을 지웠다. 사실 지민이 베타나 오메가였으면 주말에 만난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우성 알파였고 그 페로몬을 크게 조절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기에 주말에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주말에 약속이 있다고 얼버무리자 곧바로 그럼 지금은 어떠냐는 답장이 날아왔다. 회의를 굳이 얼굴 보면서 해야 하니, 대학교 조별과제 할 때도 난 조원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마음의 소리가 어느새 입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와 제 존재를 알린다. 회의실에서 마주치고 나서야 느꼈다. 절대 가까이 지내지는 말자고. 한 팀을 묶인 것도 모자라 서로 같은 직책이라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회의도 대표 둘이 서로 의견을 맞춰본 뒤에 직원들에게 전달하고 보완할 게 있으면 또 거기서 보완하는 게 효율적이니 둘이 해야만 했다. 그래도 일단 오늘은 지민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갖가지 스트레스를 충분히 받은 상태라 회의를 해봤자 좋은 성과도 없을 게 뻔했다. 결국 아까 처리했던 일을 핑계 삼아 남준이 거절의 의사를 표하자 지민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음 주에 괜찮을 때 하자며 대화를 끝냈다. 할 수만 있다면 이게 지민과의 마지막 대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곤란하네.”
 “갑자기 앞뒤 다 잘라먹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해줘야 하냐.”
 “그냥. 조별과제…. 가 아니라 팀별과제지. 그거 때문에.”
 “그게 왜, 그건 혼자 떠안고 가는 거 아니지 않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를 쳐다보는 호석에 무거운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웃은 남준이 한숨을 길게 뱉어냈다. 어, 근데 차라리 혼자 떠안고 싶다. 퇴근하려 준비를 하고 있는 도중 회사 앞이라는 문자에 여유롭게 정리하던 남준이 빠르게 부서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끌고 나오니 회사 앞에서 손을 흔드는 호석에 헛웃음을 내뱉다 호석을 태우고 근처 식당에 와서는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제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인 호석은 남준에게 있어서 고마운 존재였다. 어떻게 안 건지 항상 힘들 때면 먼저 다가오는 호석 덕분에 지금까지 회사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냐며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보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남준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지.

 

 

 

 “그러니까.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된 팀장이 우성 알파라는 거 아냐.”
 “그렇지. 회의실에서 나오고 악수 한 번 했는데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
 “네가 오메가인 줄은 알고?”
 “아니, 모를걸. 아는 건 윤 이사 같은 사람들밖에 없을 거야. 서류에만 적힌 건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

 

 

 

 그래도 조심해라, 윤 이사 그 새끼보다 일단 더 위험한 거잖아. 마치 제 일인 듯 인상을 찌푸리며 걱정을 해주는 호석에 남준이 그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물론 잠시나마 봤던 지민은 윤 이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만 평범한 알파인 윤 이사보다 몇 배는 월등한 우성 알파였기에 호석의 말대로 지민을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호석과의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남준이 곧장 침대로 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웠다. 출근하기 싫게 만드는 게 하나 더 늘었다. 하필 둘 다 알파에 심지어 하나는 우성이라. 생각만 했음에도 한숨이 절로 나와 남준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취업을 준비할 때도, 취업을 했을 때도 왜 남들이 가슴속에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는 얘기를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근데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이 많아서였는지 피곤해서였는지 옷을 갈아입고 대충 씻고 나오자마자 잠들어 악몽은 꿀 새도 없이 잤던 것 같다. 모처럼 숙면을 취하고 나니 컨디션도 나쁘지 않아 늘 거르던 아침도 챙겨 먹었다. 학생 때도 잘 챙기지 않았던 아침을 챙기고 나서 출근하니 꽤 나쁘지 않아 될 수 있으면 아침은 꼭 챙겨야겠다 생각이 들 때 즈음 회사에 도착했다. 제발 어제처럼 윤 이사를 마주치지 않기만 빈다. 일부러 윤 이사를 마주쳤던 엘리베이터가 아닌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윤 이사랑 안 마주치기만 하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것만 같았다. 1층에서 멈추는 엘리베이터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윤 이사만 아니어라, 제발. 제게 아는 체를 하지 않는 듯한 느낌에 윤 이사는 아니구나 안심한 남준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순간 남준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 안녕하세요. 남준 씨. 어디 불편하세요?”

 

 

 

 지민을 생각 못 했었다. 윤 이사를 마주치는 게 차라리 나았다. 불편하냐 묻는 지민에 안 그럼 편하겠냐며 쏘아붙일 뻔한 남준이 가까스로 웃으며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윤 이사를 피했다고 좋아했더니 윤 이사보다 위험한 인물이랑 마주쳤다. 심지어 같은 층이라 먼저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아니 어떻게 아무도 안 타냐. 제 신세만 한탄하며 숫자판을 쳐다보는데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지민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지민과 시선을 마주했다.

 

 

 

 “저, 혹시 오늘 시간….”
 “오늘…. 아, 오늘 청원에서 미팅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 그럼 주말, 아. 약속 있다 하셨죠.”

 

 

 

 약속 있다는 소리에 무슨 소리냐 물을 뻔한 남준이 가까스로 고갤 끄덕였다. 오늘은 진짜로 미팅이 잡혀있어 다행이었다. 지민과 있어서인지 답답한 느낌에 숨을 크게 한 번 내쉬는데 답답함과 묘하게 다른 기분이 들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게 굳이 따지면 갇혀있다는 게 맞는데 꼭 울창한 나무숲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기분이었다. 아침을 챙겨 먹은 게 문제인지, 아니면 지민을 만나서 속이 얹힌 건지 숨통까지 조이는 답답함에 살짝 잔기침을 내뱉으니 순간 무겁던 공기가 가라앉았다. 부서가 있는 층수에 도착하고 나니 이상하게 느낌조차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준이 먼저 가보겠다는 지민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부서로 걸음을 옮겼다. 지민의 페로몬인지, 아니면 바깥 다른 층에서 또 다른 우성 알파가 성을 내고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분명 지민을 처음 보고 느꼈던 느낌은. 순간 드는 어제의 기억에 남준이 걸음을 멈췄다. 지민이 부서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느꼈던 무겁던 공기, 지민의 페로몬이었다. 하지만 지민의 페로몬은 숱한 알파들과 확연하게 달랐다. 많은 알파들의 페로몬은 시원한 느낌의 향을 가지고 있다. 민트, 박하 등 허브의 종류 혹은 드문 확률로 장미, 국화 같은 꽃의 종류로 보통 화초의 향을 가진다. 이는 우성 알파도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리고 오메가는 이와 다르게 과일 향이 많았다. 페로몬 향이 없거나 알아채기 미미할 정도로 희미한 페로몬을 가진 오메가들, 또 드물게는 형질 변이가 애매하게 돼 알파와 엇비슷한 향을 가지는 오메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민의 향은 화초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성과 알파의 페로몬의 향 차이라면 그저 기존 향에서 훨씬 강하다는 것밖에 없었다. 이렇게 짙은 향의 풀이 있던가. 잠시 고민하며 지민이 들어간 부서를 흘끔 보던 남준이 이내 고개를 내젓곤 부서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새로운 보고서를 검토하는 중에도 지민이 신경 쓰여 글씨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오메가인 걸 모른 채 그렇게 페로몬을 풀어헤치고 다니는 것일 테다. 하지만 굳이 거짓된 신분을 아는 사람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받을 리스크가 얼마나 클지는 알고 있기에 굳이 위험요소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열성 알파들이 오메가로 신분 위조를 하는 것은 오메가 중에는 페로몬 향이 아예 없거나 희미한 오메가들이 적은 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도 열성 알파들의 페로몬은 다 다른 알파들보다 향이 짙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페로몬 향이 없는 오메가가 있어서 현재 남준이 오메가 신분으로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들키면 모든 게 끝인 치명적인 위험도 같이 가진 채.

 

 

 

 “그럼 이대로 진행하고, 다음에 한 번 저희 쪽에서 뵈러 가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예,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먼저 자리에서 뜨는 청원 쪽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허리 숙여 인사한 남준이 그대로 의자에 않아 연신 기침을 했다. 늘 거래처 사람들은 죄다 우성 알파 내지 우성 오메가였다. 이번엔 고고하게 생긴 우성 오메가였는데 우성에다 오메가라 자신을 자랑이라도 하듯 페로몬을 더 풀어 젖힌 채 미팅에 임하던 사람이었다. 과하게 풀어내는 페로몬에 성욕이 일기는커녕 머리만 어지러웠다. 아마 개방된 곳에서 이 상태로 미팅을 했다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눈에 훤하다. 덕분에 당분간 스무디랑은 거리를 두게 생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미팅을 끝내고 바로 퇴근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 상태로 회사에 돌아가 윤 이사나 지민을 만났다간 몸이 버티질 못할 거라 확신했다. 갇힌 공간에 있어 향이 더디게 빠지는지 계속 있다간 진짜 이성을 잃을 것 같아 빠르게 룸에서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 방에서 벗어나자 숨통이 트이는 게 살 것 같았다.

 


 
 “컨디션이 좋기는 개뿔.”

 

 


 아침에 좋은 컨디션은 이렇게 닥칠 재앙들에 대한 작은 선물이었구나 싶었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한 건지도 모를 정도로 차를 몰았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남준이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모든 긴장이 탁 풀려 그대로 옷도 못 갈아입은 채 잠에 들었다.

 

 

 


 ‘미친, 열성이라고?’
 ‘존나 역겨워.’
 ‘나였으면 그냥 죽었다.’

 

 


 나중에 사고 치지 말고 그냥 지금 죽지그래. 그 말을 끝으로 눈을 부릅 뜬 남준이 그대로 화장실로 뛰어가 빈속을 게워냈다. 필요 이상으로 과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잊고 싶은 과거들을 자꾸 끌어오는 걸 보면 확실했다. 오늘만큼 심했던 적은 없었다. 늘 같은 장면만 보여주던 꿈은 이제 칠흑 같은 어둠에서 붉은 글씨로 빛나다 흘러내렸다. 피와 같이. 머리가 어지러워 눈앞이 캄캄할 때가 돼서야 화장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아직 어두운 느낌에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즈음이었다. 피곤했지만 더 자고 싶지도, 잠이 오지도 않았다. 눈을 감았을 때 피 같던 그 말들이 제 손에서 흘러내리고 있을까 봐 두려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결국 주말을 뜬 눈으로 지새우다 출근하기 두 시간 전에 눈을 감은 남준이었다. 그마저도 몸을 혹사시켜 간신히 잤던 거라 피로는 더 배로 누적되는 듯했다. 겨우 정신을 다잡고 회사까지 차를 끌고 나오긴 했는데 이 이후가 문제였다. 오늘은 결재받을 서류도 있었고 또 지민과는 회의를 언제 하냐에 대한 대화를 나눠야 했다. 전자는 어쩔 수 없다 해도 후자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분명 지민의 페로몬을 버틸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렇게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데 엘리베이터가 열린 채 닫히지 않고 있었다. 고장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사람은 타고 있다. 이내 옆에서 사람들이 타기 시작하자 그제야 시선을 거뒀다. 왜 저렇게 안 닫고 있나 했더니 다른 사람들 기다려 주느라 열고 있었나 보다. 혼자밖에 없었으니 아마 다른 사람들도 탈 수 있게 기다려 준 것 같았다. 어차피 저는 저 엘리베이터를 탈 생각이 없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진 여유가 있으니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도 충분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남준이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다른 사람이 먼저 버튼을 눌렀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지민이 웃으며 고개를 숙여왔다.

 

 

 

 

 "남준 씨 보이길래 기다렸는데 안 오시길래요."

 "아, 굳이 저 때문에 괜히…."

 "아니에요, 그냥 얘기할 것도 있고. 저희 회의도 아직 못 했잖아요."

 

 

 

 아까 엘리베이터에 있던 사람은 지민이었나 보다. 이렇게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을 초장부터 만나니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무해하게 웃는 얼굴과는 달리 또 엘리베이터 안 공간은 알 수 없는 짙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심한 것 같아 급하게 다른 층을 누르곤 층에 다다르자마자 빠르게 나오는데 사라지긴커녕 그대로인 중압감에 그대로 벽을 짚은 남준이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지민도 같이 내린 상태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전에 봤던 서늘한 표정으로 남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남준 씨, 제가 물을 게 딱 하나 있는데요.

 

 

 

 

 "역시. 저 피하시는 거 맞네요. 저 왜 피하시는 겁니까?"

 

 

 

 기분이 꽤 안 좋았는지 점점 더 짙어지는 페로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남준이 지민과 눈을 맞췄다. 머리 안이 너무 울려 절로 인상이 써졌다. 여전히 서늘한 얼굴로 남준을 바라보던 지민도 남준의 반응을 보고 뭔가 느꼈는지 페로몬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서늘하던 표정도 같이 사라진 지민의 얼굴에는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조금은 진정된 듯 멀쩡한 얼굴의 남준을 한참을 보다 남준이 먼저 자리를 피하려 하자 지민이 급하게 남준의 팔을 잡았다.

 

 

 

 "저, 이게 실례되는 말인 건 아는데…. 남준 씨 혹시."

 "실례되는 말인 거 아시면, 하지 마십시오. 괜히 실례될 짓 하지 마시고."

 

 

 

 지민의 팔을 뿌리친 남준이 인상을 쓴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허공에 어색하게 머무른 지민의 팔을 한 번 흘긋 보던 남준이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몸을 실었다.

 

 

 

 "이걸로 제가 왜 박지민 씨를 피하는지에 대해 충분한 답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

하이고... 약 3개월만에 올라온 2화네요...

계정 삭제 걸었었는데 이제 제 계정은 무사합니다...(눈물)

'모순 矛盾'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짐랩/민랩] 모순 矛盾 - 01  (0) 2017.08.20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